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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 서원

봉강서원(鳳岡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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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개요

건립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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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주련

향사참례기


봉강서원 개요

주소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 고산동 산725번지

배향선조

◎10세 충선공 문익점(文益漸) - 충선공파 파조
◎12세 정혜공 문래(文萊) - 충선공의 손자, 호는 이곡으로 의안공파 이곡파 파조
◎12세 양민공 문영(文英) - 충선공의 손자, 호는 해은으로 의안공파 해은공파 파조

향사일

음력 3월 중정(中丁)

창건연도

1609년(광해군1)


봉강서원 전경

봉강서원 강당

경현사 - 신실

❏ 연 혁

문익점(文益漸)과 문래(文萊), 문영(文英)을 기리기 위하여 1609년(광해군 1) 건립된 뒤에 두 차례나 소실되었던 것을 1861년(철종 12)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58년 현재의 서원 터에 문중의 후손들이 신실인 경현사, 삼문, 강당, 외삼문인 상의문, 충선공 유허비각 등을 복원하였다. 해마다 3월 중정(中丁) 에 제사를 지낸다 .

❏ 배향인물

1) 문익점(文益漸, 1331∼1400)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충정공 문숙선(忠貞公 文淑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호는 충선(忠宣)이고 자는 일신(日新)이며 호는 삼우당(三憂堂)인데 그 의미는 국가가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리학(性理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함을 근심한다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지은 호이다.
8세에 학당(學堂)에 입학하고 12세에 이곡(李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3세에 목은 이색 선생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고 30세에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신경(新京)에서 베푼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였다. 45세에 중현대부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制敎)가 되고 58세에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경연동지사(右文館提學 經筵同知事)에 올랐다.
70세인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돌아가시니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했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은 22년(1440)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고, 목화재배의 기틀을 만들어 백성을 부강하게 한 공으로 부민후(富民候)를 추봉하였다.

문익점은 고려 말 사신을 봉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씨앗을 가져온 분이다. 그가 가져온 목면 씨앗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보급된 목면은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한 생활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면 재배가 초래한 여러 가지 국가적 공헌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이 평가를 받아 조선 영조 왕은 문익점의 후손에게 거듭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문익점)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功)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德)이 강성군보다 훌륭할 수 없다." 라고 극찬했다.

문익점은 목면의 전래자로서 만이 아니라 도학(道學)의 창명과 덕행,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등 영남 유학의 거목들이 목면 보급에 관한 그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칭송하는 시문을 남겼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와 삼우당문집에 실려 있다.

묘소(경남 산청)에서 4월5일(양) 묘제를, 부조묘(不祧廟 전남 보성)에서 돌아가신 날인 2월7일(음)에 제사를 지내며, 장연서원, 저산서원, 도천서원, 강성서원, 매산서원, 봉강서원, 운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2) 문래(文萊)

자(字)는 자봉(子蓬), 호(號)는 이곡(理谷), 시호(諡號)는 정혜(靖惠)이다.
문익점의 손자로 경사(經史)에 통(通)하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산수(算數)·척도(尺度) 등에 밝았으며, 물레를 처음 만드신 분이다.
1395년(태조 4) 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가 치사(致仕)를 거쳐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大夫)·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3) 문영(文英)

호(號)는 해은(海隱), 시호(諡號)는 양민(襄敏)이며 문익점의 손자이다.
1393년(태조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그는 베짜는 방법을 만들었는데 그간 만든 베를 문영베라 한 데서 「무명」이라는 말이 생겼다.

❏ 건축물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경현사(景賢祠)를 비롯하여 강당인 습예당(習禮堂)과 내삼문, 외삼문인 상의문(尙義門)과 충선공유허비와 비각 등이 있다.

* 위의 글은 한국서원이야기(http://cafe.daum.net/psj3851)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봉강서원 건립 유래

충선공 익점 선조님의 큰 아들 중용(中庸)公의 장남 諱승노(承魯)께서 의성 현감을 하실때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멀리 산청까지 갈 수가 없었기에 선조의 사묘(祠廟)를 만천동(경북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공룡발자국 유적지 안쪽의 마을 뒷산)에 세웠다. 사림들이 봉강서원(鳳岡書院)이라하여 제례를 모셨으나 세월이 흘러 서원은 없어졌다.
승노(承魯)공께서 의성 현감으로 계실 때 금성면 제오동에서 목화를 시험재배하여 토질이 적합함을 아시고 목화재배를 권장하여 의성군이 목화의 주산지가 되고 농가소득이 높아진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군의군 우보면 달산동 선대 일가들이 의성군 금성면 재오동에 충선공 선조 목면유전포비를 건립하여 선조를 추모하였으며
- 1936년 경상북도에서는 금성면 탑리에 충선공 선조 사적비를 세우고 대구 일가들이 이곳 금성초등학교에 밭 800여 평을 매입하여 매년 목화를 재배토록 하여 매년 면화 풍작제를 관민들이 모셨다.
- 1945년 독립 후에는 사림(士林)들이 매년 향례를 모시고 대구종친회 대표들이 참석하여 재수비를 부담하여 왔는데 1949년 농지개혁때 대구의 덕환(悳煥)씨가 아들 명의로 소유권을 변경하였다.
- 1962년 포항의 영식(榮植)씨와 명득(明得)씨가 자비로 단장을 쌓고 수호 관리케 하였다. 현재는 군에서 비석 주변의 300평에 목화를 심고 사적비를 관리하고 있으며
- 1960년 이곡(14세 래)파 후손들의 집성촌인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의 현 봉강서원 터에 일가들의 성금과 박재(博在), 홍재(洪在), 병우(炳祐), 성재(性在)씨 등이 신실인 경현사와 삼문 과 강당 외삼문 등을 중수하였으며 이곳의 선대 일가들은 의성 재오동에 선조 목화 전포비도 세웠고 문중의 운영에 병원(炳元)씨와 경재(慶在)씨가 이어 받아 많은 노력을 하셨다.


봉강서원 사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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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서원 영상

2019년 향사

2018년 향사

2016년 향사-1

2016년 향사-2

2010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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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입구

상의문(외삼문)

 정문 (상의문)현판

마을 안내석

강당

서원전경

신실인 경현사 외삼문

유허비각

충선공 유허비

충선공 영정

이곡공(래) 영정

해은공(영)영정

강당인 봉강서원 편액

신실인 경현사 편액

비문보완
이조좌랑 휘 道敬유허비의 비문중 7세손 휘永進공이 의성금성면만천리에 있던 三賢書院이 순조32(1832)년 소실됨을 애석히 여기다가 철종12(1861) 고산리셋터보상으로 이건하고 봉강서원으로 개칭하게 이른때 까지 6세손 휘홍주 홍익 홍수와 같이 공이 있었으나 누락되어 바로 잡음 근수인 11세손 현재

휘 道敬 유허비

덕문재 건립성금

현판과 주련사진

 
봉강서원 상량문

중건기

 

봉강서원 복설운(1)

봉강서원 복설운(2)

   
   
                 

 

2010년 이전 행사사진

2010년 향사 사진제공: 대구종친회 영록님

2009년 향사 사진제공: 대구종친회 영록님

 
 

2006년 향사

충선공 진설

정해공 진설

양민공 진설

충선공 삼우당(익점)축문

정해공 이곡공(래) 축문

양민공 해은공(영) 축문

분정기

 

행사 준비

   

향사후 일가님들과 환담

작별인사
기념촬영

부산의 일가님들

봉강서원 2008년 향사참례기(문병달)

만덕 동회앞에 종친회승합차가 도착하고 삼계문중회장님 용만님이 도착하시고 두표님과 부산종친회장님도 오셔서 약속시간인 07:30 출발했다.
청도휴게소에서 식사하실분이 없어 커피한잔을 들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군위 나들목을 나와 봉강서원앞에 도착했다. 정말 대단한 기술이다.
10:30 서원에는 종구님과 일가님 몇분이 행사 준비를 하시다가 인사를 나누었다.
봉강서원에는 3년간 개근하여 참석하는데 작년에는 행사후에 해은공 묘소에도 다녀왔으며
1년만에 대하는 분들이지만 모두가 반갑게 대한다.
아직 대구와 청도 청송에서 오신다고 하신 일가님들이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마을을 돌아보았는데 탁주한병 사먹을 곳도 없는 곳이었다.
제사전에 소주와 돈육으로 입가심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일가들이 도착하고 분정을 하였는데 대구 남정회장이 초헌, 삼계문중 도식회장이 아헌 부산종친회장이 종헌이고 대구의 한기님이 축을 하였으며 집례는 청도 석범회장이었고 알자는 종구씨였다.

예년보다 많이 늦어 12:35에 도열하였는데 10여명은 서원 마루에서고 헌관과 집사들과 참제자 20여명은 신실앞에 섰다 헌관집사의 행동과 홀기가 맞지 않아 혼란이 있는데 진행을 살피지 않고 홀기를 읽고 있으며 알자인 종구씨만 바쁘기는 하지만 어긋나기 일수이다.
서원이라 제수는 유림식으로 날것을 사용하고 쌀과 좁쌀은 찐 것을 사용하고 동계입 서계출로 알고 있는데 서쪽문으로 들어가 충선공을 먼저 모시고 래, 영 순으로 모신뒤에 동쪽으로 나왔다.
옛날부터 이렇게 했다는데 예를 갖춘다면 다른곳과 같이 함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일반 참제자는 참신례가 없었고 사신례만 있어 절을 한번만 했으니 홀기에 문제가 있나보다.

13:07 예필을 하고 마루에서 식사를 하는데 일가들이 준비한 정성이 깃든 식사와 매년 준비하는 동동주를 들었고 일가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문이재님은 공군의 대선배여서 더욱 반가웠다.
식후에는 요사체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부녀자들이 10여명 준비를 도왔는데 참석자에 비하여 많은 준비요원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14:20 일가들과 인사를 나누고서원을 나와  제오리의 공룡발자국유적옆의 목면유전전포를 가기위하여 제오리를 찾고 번지는 몰라 아무렇게나 입력했더니 다른 마을로 가 버려 길을 물어서 찾았고
금성리의 목화시배지지 역시 찾지 못하고 물어서 찾았으니 번지를 모르면 지도가 필요함을 느낀다.
주변은 정리가 마무리되었고 목화재배장으로 남겨둔 듯한 땅은 50여평이나 될듯하다.
두곳에서 준비해간 탁주 한잔 올리고 부산을 향했고 만덕에 도착하여 삼계문중에서 음식을 대접하여 소주한잔 나누면서 용만일가님과 많은 대화를 했다.

봉강서원 2006년 향사참례기(문병달 )

07:40 온천장 역에서 병준님과 청계부회장 병준상임부회장 창근님 경문님 차갑님으로 7명이 남양산을 거쳐 08:00 55번고속도로에 진입하고 08:40 동래구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09:00 동명휴게소에서 25분을 쉬었다
09:50 고속도로에서 나와 919번 도로에 진입하였는데 달산마을로 진입하는 길을 지나쳤기에 길가는 분께 물었더니 도로 내려가서 나호1교도 들어가라고 한다. 나호1교를 찾고 신흥사의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서 10:10 봉강서원의 뒷편의 길을 따라 주차장인 마당앞에 주차를 하였다. 전번에 왔을 때에는 주차장도 없었는데 기와도 덮고 마당에는 쇄석도 깔았다.
영훈 회장님은 먼저와 계셨고 대구의 한기님과 청도회장님과 경제님과 일가님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방안에서는 분정을 하고 분정기와 시도기를 작성하였고 나는 서원을 돌면서 전번에 찍지 못하였던 주련과 시를 적어 붙인 목판들도 찍었다
신실에 들어가서 충선공과 정혜공 해은공의 영정을 차례로 찍어서 나왔다.

11:25분 청도회장님의 집례와 신만부회장의 초헌으로 제사가 시작되었는데 창근님이 축을 읽었으며 참석자는 30여명이었고 지역일가들의 힘으로는 목조건물을 유지하기에 역부족이어서 신실의 입구문은 꺽쇠를 곳곳에 박아도 기우러져 있었고 신실과 비각도 허물어져 가고 있으니 충선공파 종회에서 여력이 있다면 가장 먼저 지원이 되어야 할 곳으로 보인다
아헌관 차갑님의 잔올림과 경문님이 알자를 하였으니 제관과 집사가 거의 부산 일색이다.
11:55 예필을 하고 음복을 하니 집에서 담은 동동주인데 단술보다 쌀알이 많아 먹기는 다소 거북하였으니 맛은 좋았다.
관리사에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하였는데 회의를 하고 계셨고 참석인원 보고와 회장인사에서 경재님은 격식도 다 갖추지 못하고 일가들이 수호하려니 부끄러움이 많다고 하시었고 한기님의 감사보고가 있었고 세입세출 결산과 예산안 및 행사 및 기획안은 유인물로 대치하고 폐회하였다
바로 식사가 시작되었는데 찬이 무척이나 많아서 정성드려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었고 술도 독체로 가져와 놓으니 대접이 융숭하기 짝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일가님들께 나호1교 부근에 달산리 안내판이 있어야 하겠더라는 건의를 드리고 영훈회장님과 사모님이 탄 차량과 우리의 승합차가 함께 떠났다.

13:30 의성 탑리의 목화시배지를 지나서 오른편 길을 따라 제오리로 들어가서 공룡 발자국을 구경하고 이장이 나오셔서 설명을 하시는데 경노당은 옆으로 옮겨 새로 지었고 공터가 되었는데 충선공의 비석은 있는 자리에 그냥 두었기에 길에서 보면 모로 서서있었고 위에 얹은 갓이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비석을 보존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고 하는 이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목화시배지가 비석의 60m 위라고 하여서 산을 올랐더니 산소만 2기가 산마루에 있을 뿐이니 어느쪽으로 60m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만부회장은 이장님께 만천동을 물었더니 동행해 주시겠다고 하면서 오트바이로 앞장서고 뒤를 따라 잠시갔더니 14:30 만천휴게실이란 간판이 붙은 구멍가게가 있었고 마을에는 잔치가 있는 듯 한데 박재한 공덕비가 있었고 마을의 고가는 지산 함양박씨 정택 유덕비가 보인다. 이 마을은 함양박씨의 집성촌으로 문가들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경북도 환경위원이라는 분이 말씀해 주시면서 이곳에서 발행한 책에 문익점선조님의 기록이 있다고 하여 한권을 부탁드렸다.
15:20 만천동을 출발하여 목화시배지에 가니 공사중이던 조만국 산성의 진입로 공사와 목화시배 비석주변에 돌을 까는 공사와 목화재배장의 부지가 있었고 기념관인 건물고 화장실 건물이 있었는데 시배지의 공사하는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한 장 찍은후 시배지를 떠났고 15:40 가산나들목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16:금호분기점을 경유하고 화원을 지나 16:20 현풍할매곰탕집이 유명하다면서현풍나들목에서 나와  현풍할매곰탕집에 주차하였다.
술잔을 돌리고 수육으로 안주를 하고는 곰탕이 나왔는데 고기가 반이요 곰탕이 반이다. 여러 가지 담소를 나눈후 17:30 현풍을 출발하면서 내일 창녕에서 집안모임이 있다고 영훈회장님부부는 창녕으로 가시고 기사님은 우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