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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산서원

저산서원

저산서원(楮山書院)


❏소 재 지: 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회룡리

❏배향인물: 문극겸(文克謙) 문달한(文達漢) 문익점(文益漸) 문 찬(文 贊)

                       유지강(柳之綱) 유지기(柳之紀)

❏창건연도: 1577년(선조 16)

❏향 사 일: 2월16일(음






 

연 혁


저산서원은 1577년(선조 16)에 창건되었다가, 고종 6년(1869)에 철폐되었던 것을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당에는 문극겸(文克謙)을 중심으로 하여 문달한(文達漢), 문익점(文益漸), 문찬(文贊), 유지강(柳之綱), 유지기(柳之紀) 등이 모셔져 있다.


배향인물


1)주벽-문극겸(文克謙, 1122∼1189)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덕병(德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집현전대학사 경정공(敬靖公) 공유(公裕)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공인(公仁)의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된 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다가 의종 때 급제하였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좌정언(左正言)이 되어서 위복(威福)을 자행하던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과 탐욕을 일삼던 술인(術人) 영의(榮儀) 등을 탄핵하다가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왕 측근자의 모함으로 다시 진주판관으로 좌천되려다가 “직신(直臣 : 국정이 혼란할 때에 기탄없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자)을 외관(外官)으로 좌천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라는 유사(有司)의 상주(上奏)로 안으로 들어와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고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앞서 좌정언으로 있을 때 백선연 등의 비행을 탄핵해 좌천된 것이 직신으로 알려져 화를 면했으며, 의종이 거제도로 추방될 때 문극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우승선(右承宣)·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이공승(李公升) 등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무신들에 대해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뒤이어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하였다. 그 뒤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군을 겸해 무신정권기에 문신으로 문무를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인(璘)에게 출가시켰으며 이 때문에 계사의 난에 일족이 다 화를 면하였다. 다시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이어 예부시랑이 되었으며, 1173년 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최시행(崔時幸) 등 진사 32인을 뽑았다. 뒤에 추밀원사가 되었는데, 1179년(명종 9)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좌천되었다. 1180년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고, 이듬해 수대위(守大尉)가 되었으며,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가 되어 금극의(琴克儀) 등 진사 31인과 명경(明經) 5인을 선발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 아상(亞相)이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2)문달한(文達漢 ? - 1392)

문달한(文達漢)은 고려 평장사(平章事) 극겸(克謙)의 6세손이다. 우왕 때에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고 여러 벼슬을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받고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승진하고 평리(評理)에 옮겨졌다 양광(楊廣) 경상도 도체찰사(慶尙道部都體察事)가 되었는데, 우왕 39년 8월 왕이 명(命)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하고 게으름과 사졸의 강약을 살피고 그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거든 가두어 명을 기다릴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곧 처단하라"고 하였다당시 왜적 천여명이 옥천(沃川) 보령(保寧) 등의 고을을 함락하고 개태사(開泰寺)로 들어와 계룡산(鷄龍山)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문달한은 왕안덕(王安德) 도흥(都興)과 더불어 공격하여 적(賊)들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자 공주목사(公州牧使) 최유경(崔有慶)과 판관(判官) 안자호(安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우다 자호(子浩)가 패하여 죽었으므로, 달한이 또 안덕 (安德)과 흥(興), 김사혁(金斯革) 안경(安慶) 박수연(朴壽年) 등과 더불어 공주(公州) 반용사(盤龍寺)에서 싸워 팔급(八級)을 베었다.
그 후에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니 물이 바야흐로 불어서 깊고 얕음을 측량할 수 없었다. 왕이 말을 타고 건너려 하니 달한이 "물의 깊고 발음도 가히 알지 못하는데 어찌 갑자기 들어감이 마땅하리까" 하고 만류하였는데, 별안간 사냥꾼 한 사람이 물을 건너가 짐승을 쏘는지라 우왕이 크게 노(怒)하며 "만약에 물이 깊다면 저 사람은 날아서 건넜느나? 문평리(文評理)가 나를 속였도다"하고 곧 달한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 출입을 금지하고 이어 벼슬을 깍았다.
오래된 후 최영(崔瑩)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최단(崔鄭)을 보내어 우왕에게 아뢰기를 "달한은 우직으로써 어지(御旨)를 거슬리고 집에 있어 억울하니 청컨대 출입을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허락하거늘 최영이 정방(政房)에 있으며 달한의 직책을 회복시켰다.
우왕이 달한의 이름을 보고 말하기를 "지난 번에 단(鄲)이 김실(金實)을 시켜 달한을 용서하도록 청하더니 벌써 죄를 면하였느냐?" 하고 붓을 잡고 글귀를 없애버렸으며 또 단(鄲)과 실(實)의 직(職)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렸다.
이어 달한을 기용(起用)하여 평리(評理)를 제배(除拜)하고 추충익재보조공신(推忠翊戴寶祚功臣)의 호를 더해 내렸다. 찬성사(贊成事)로 오름에 헌사(憲司)가 탄핵하기를 "달한이 외척을 빙자하여 탐람(貪勢)을 방종히 하였다"고 하므로 합포(合浦)에 귀양보냈는데 도당(都堂)이 가까운 지역에 두기를 청하여 철원(鑛原)에 옮겼고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제배(除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함에 대간(臺諫)이 서로 상소의 글을 올리기를 '달한이 이림(李琳)의 매서(妹壻)로써 정사에 참여하여서 불의를 방자히 행하거늘 이림의 족속이 모두 이미 귀양되었는데도 달한은 홀로 도중(都中)에 있으나 청컨대 관직을 거두고 내쫓으소서' 하므로 이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 공양왕 4년에 순평군(順平君)을 봉하여 졸(卒)하였다 아들은 계종(繼宗) 효종(孝宗)이다.

3)문익점(文益漸, 1329∼1398)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숙선(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襄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에 있다.


4)문찬(文贊)


 본관은 남평(南平) 서천군수를 행직했다.


* 참고자료


문찬공 묘표(묘소는 김제군 공덕면 제말리에 소재하고 있다)


공(公)의 휘는 찬(贊)이요 호는 명천(明泉)이요 성(姓)은 문씨요 남평인이니 고려조의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이 공(公)의 9세조 되신다


고조 휘 경(環)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요 증조 휘 달한(達漢)은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端蘿補祥功臣) 삼중대장문하 찬성사 순평부원군(三重大匿門下贊成事順平府院君)이요 조부 휘 효종(孝宗)은 이조(李朝)에 판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이니 시호 호간(胡簡)이요 아버지 휘 치(致)는 세종(世宗)의 내외6촌동계(內外六寸同潔)에 참여하고 호익시위 좌령부호군(虎翼侍衛佐領副護軍) 좌익일등공신(佐翼一等功臣) 영안군(永安君)에 기록되고 경기(京畿) 마전군(麻田郡) 서쪽 삼화리(三和里) 앞산 기슭 병좌원(丙坐原)에 예장(禮葬)되었으며 어머니 정부인하음봉씨(河陰奉氏)는 소윤(小尹) 안국(安國)의 따님이니 묘(墓)는 함께 묻히 었다


공(公)이 서천군에서 처음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경전(經傳)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후학(後學)들 열어줌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니 사림(士林)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서 저산(楮山) 서원에 배향하였다. 묘(墓)는 전주군(全州郡) 이동면(梨東面) 장산 유좌원(長山齋坐原)이다. 배위 숙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공(公)의 묘(墓) 오른편에 쌍봉(雙封)이다 아들 상경은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이요 네 아들을 낳았으니 명서(命瑞)는 생원(生員)이요 명현(命賢)은 진사(進士)이며 명필(命弼)은 생원(生員)이요 명창(命昌)은 호조좌랑(戶曺佐郎)이다. 명서(命瑞)는 자식이 없고 명현(命賢)의 아들에 세경(世敬)이요 명필(命弼)은 1녀를 두었으니 이세규(李世珪)에 출가하였고, 명창(命昌)은 아들 넷을 낳았으니 세영(世英)은 소위장군(昭威將軍)이요 세웅(世雄)은 통덕랑(通德郎)이요 세호(世豪)는 낭장(郎將)이고 세걸(世傑)은 참봉이다 세경(世敬)은 자식이 없고 세영(世英)의 아들 응성(應星)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요


세웅(世雄)의 아들 응벽(應壁)은 통덕랑(通德郎)이요 세호(世豪)는 아들 넷을 낳았으니 응락(應洛)은 전력부위(展力副尉)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대행하였고 응하(應河) 응한(應漢)과 응렴(應濾)은 공조좌랑(工曺佐郎)이요 세걸(世傑)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응서(應瑞)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응회(應會)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응시(應時)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이다.


아, 공(公)이 잠영세가(替榮世家)의 후예로 벼슬이 군수(郡守)에 그쳤으나 종손(宗孫)이 떨어지고 문헌(文獻)이 유실 되어 그 덕행(德行)을 만(萬)에 하나도 알길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으리오? 옛 비(碑)가 이즈러져 이번에 다시 세우면서 삼가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을 비(碑) 후면에 기록한다.


5)유지강(柳之綱)


별암당 유선생이 돌아가시니 이름은 之綱(지강)이고 字는백거이며 시조 장령공 휘 濕은 완산백에 봉하였으며 자손들이 관향(완산=전주)으로 삼았다.


배는 전주최씨 이시고 다섯 아들과 한 분의 사위를 두었는데 모두들 과거에 급제하여 삼한 국대부인으로 봉호를 받았으며 막내 아들은 생원 문과이신 휘 克渠(극거)이시고 관직은 호조판서 이시니 즉 공의7대조이시다 대대로 벼슬을 이어 세습함은 가정의 가르침이 있음이며 공의 덕기는 순수하고 성품은 강명하여 어릴때 우뚝한 거인의 뜻과 같이 홀연하였다 마치 학이 닭무리중에 있는 것 같고 오동에 난세가 앉은 것 같았다


매양 사마광이 독을깨여 친구를 구한 지혜가 있었고 조금자라서는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약관의 나이로 사문숙성하여 호남과영남의 이재를 겨루는데 연첩삼장 하였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 입문 사문의 난해를 즐거움과 유익하게 탐구하여 같은 처사중에 학행이 고명한 죽헌을 벗삼는 지기가 되었다 정여립이 허명으로 몰래 조야를 경동하니 공은 한번보고 그가 허식에 의한 역모임을 알고 단교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고 감복하였다 공은 본성이 효우정성 하여 충성과 봉양의 의절은 한결같이 소학을 준수하니 사림의 표준이 되어 방백(관찰사)이 효행청념 으로 천거하였다. 선조조에 북부참봉에 제수하니 세가대신 들이 학문을 사랑하는 공은 장차 크게 쓰이리라 하였다.


공은 붕당이 극성 한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독서와 제자를 가르치며 지방에 머무르던 중 정유년 왜구가 창궐하니 백의창의하여 김제 땅에서 적의 무리를 물리쳤다.


만력병오 공년 오십사세 오로지 경학에 뜻을 두고도 과거에는 힘쓰지 않았다 어머니 명으로 사마시에 삼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공의친족 춘호공(유영경.영의정) 이 과거를 보아 청요직에 발탁됨을 권하였으니 공은 공손이 사양하고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생활 수년에 광해군이 왕이 되니 삼창(유희분.박승종.이이첨)이 전권을 잡았고 칠신이 쫓겨났다.


이때 감사 이경전이 향인과 체결하여 무뢰한 무리들을 이끌고 장차 간당과 부합하여 소의를 모아 외응계획을 삼아 일향장보를 위협하니 두렵고 실색하여 겁을 내어서 따랐다 공의 형제는 우뚝서서 굴하지 않고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니 고을 동지중 동의자 최석계 김봉곡 유조헌 박매포 (청하서원종향) 유춘포(화로) 김동계 제현도 홀연이 지주가 되어 혹한의 잣나무와 같은 모든 호남의 선비들은 이에 의지 하지 않고 난에 추종하지 않았다 공은 은둔하여 시골에 살면서 송죽을 벗삼아 시를 읊으며 자적하고 수석사암에 소요완보하며 청풍명월에 스스로 회포를 풀었다

공명과 부귀는 일장춘몽처럼 여기고 암운계어로 사시의 경치를 보면서 호를 별암으로 짓고 제호로 삼아 편액하였다.

대계 석인에게 보여주는 고반(쟁반을 두드리며)을 즐긴다는 뜻이다


만세력 신유년에 어머니가 향년 구십일세에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육십구세요 늙었어도 어머니를 사모함이 젖을 잃은 어린애처럼 가슴을 치며 주야로 통곡하였고 이에 시묘살이 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효로서 일생을 마쳤다 어찌 일향의 현사라고만 할까 가이 백세의 사표일지어다. 병건도광 정해(1827년.선조27년) - 후손의 자료제공에 의해 전주부 향현사 성책의 내용으로 대체했다.


6)유지기(柳之紀)


 정암 유선생 휘 지기는 별암 선생의 아우이다.

공은 신기가 수려하며 재기가 무리 중 에서 뛰어나 연보 십육세에 예능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백석 유사부 즙이 한번 그 위의가 연정함을 보고 연정이 말하기를 진실로 명세진유라 할 만하다. 그 당예제 하여 말하기를 정암이라 하였다.

공의 아버지 병이 있을때 형과 더불어 뫼시면서 병석을 떠나지 않았으니 한 노인의원이 말하기를 꿩의 알이 묘약이라고 하였다 이 겨울에 구할 까닭이 없어 밤낮으로 축천 하니 문득 꿩 한 마리가 알을 떨어뜨리고 갔다. 또한 부모상의 범절은 한결같이 예절을 따랐으며 시묘 살이 3년 동안 제복을 벗지않고 애통해 하였다.

또 형의 상사에는 모든 장상이 예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복을 벗은 후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침범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공은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파천함을 듣고 분함을 여기지못하면서 말하기를 천도가 어찌하여 나라일이 어려움이 많은가 지금 내가 살아서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죽어서 임금에게 보답하지 못함이니 살아서 다시 무엇하리 라고 맹세하고 가동을 거느리고 난에 달려가기 위하여 계룡산에 이르러 강화가 성립됨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십여장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절의로서 생을 마치니 어찌하여 충효가 아울러 형제에서 나왔는가? 이는 곧 질풍에 굳센 풀이요 세한에 송백이니 예로부터 절의의 선비는 어찌 공과같이 생을 버리고 의에 나감이 있을까? 비록 죽었다 한들 후회함이 없으리라 - 후손의 요청에 의하여 고종5년(1868년)에 발행한 전주부 소재 서원및 향현사 성책 예조 존안에 실린 내용을 전제합니다.


건축물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되어있고 강당이 있다. 사당에는 충숙공 문극겸을 중심으로 하여 문익점, 문찬, 유지강, 유지기 등이 모셔져 있다.


참고-김제문화원, 김제의 숨결-김제군편, 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1994

남평문씨 대종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