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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 서원

송호서원(松湖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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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개요

묘우상량문

서원 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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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관광지


서원개요

소재지

경남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 7번지

배향선조

◎ 3세 충숙공 문극겸      ◎ 4세 효혜공 문유필

제향일

음력 3월 20일

창건연도

1777년(정조1년)

문화재

경남 문화재 자료 102호

연혁

1777년(정조1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역평에 창건함
1871년(고종7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됨
1957년 일가들의 노력으로 사우 등을 복원함
1985년 합천댐 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이건 복원함




❏ 배향인물

1)주벽-문극겸(文克謙, 1122~1189)

자는 덕병(德柄)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고려 제16대 예종 17년(1122)에 남평에서 집현전대학사 경정공(敬靖公) 문공유(文公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의종(毅宗) 8년(1154)에 음직으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 判官)이 되고 37세이던 의종 12년(115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의종 17년(1163) 좌정언(左正言)으로 왕에게 조정의 내시와 점장이로 인한 정사의 폐해를 상소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좌천되어 황주판관으로 나간 문극겸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기림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 근신들은 대수롭지 않은 실수를 부풀려 왕에게 고하고 파면을 건의하자 왕은 다시 진주판관으로 좌천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유사(有司)에서 “문극겸은 바른 정론을 주장하는 신하인데 거듭 외직으로 내몰아 언로를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했다. 왕은 이 간언을 받아들여 문극겸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하고 후에 전중 내급사(殿中 內給事)로 승진시켰다. 정중부의 무신 난으로 폐위가 된 의종이 남쪽으로 쫓겨 가다가 말 위에서 “짐이 진즉 문극겸의 말을 쫓았다면 어찌 이런 욕된 일을 당 했겠는가”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명종(明宗)이 즉위한 뒤 문극겸은 우승선(右承宣) 어사중승(御使中丞)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을 겸임했으며 재상이 된 후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했다. 무신정권 하에서 문신으로서 문무의 요직을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명종 15년(1185)에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고 이듬해에 아상(亞相)으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하다가 이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명종 19년(1189)에 향년 86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사흘간 조회를 중단했으며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문극겸은 효성과 우애가 깊고 성품이 자상하고 인자했으며 충성스럽고 정직하여 당시 유능한 재상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명종(明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고간원(叩諫院-공주시 유구)에서 10월1일(음) 묘제를 지내며 장연서원, 송호서원, 저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으며, 고려대전(파주) 전당에도 배향되어 있다.
*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2003.2 - 2004.8 방영)에서 문극겸의 강직하고 충성스운 활약상이 소개되었다.

2) 문유필(文惟弼, 1151∼1228)

고려의 문신·재상. 본관은 남평(南平). 고려 의종 때 지문하성사 집현전대학후사(知門下省事集賢殿大學士)를 지낸 공유(公裕)의 손자로,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지낸 극겸(克謙)의 아들이다.
벼슬에 나아간 시기와 방법은 확인되지 않으며, 1216년(고종 3)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이미 재추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1220년 독직사건(瀆職事件)에 관계되어 안서부사(安西副使)로 좌천되었으나, 다음해 곧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승진하였다. 그뒤 순탄한 관로를 밟아 1222년 지문하성사, 1227년 참지정사 판예부사(參知政事判禮部事)가 되었으며, 다음해 지문하성사로 있다가 별세하였다.
장연서원과 송호서원에서 제향한다.

❏ 건축물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내삼문(內三門), 10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8칸의 주사(廚舍) 등으로 되어 있다.
사우에는 문극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는 제원(祭員)의 숙소로,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장소로, 주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庫子)의 기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 참고- 위의 내용은 한국서원이야기(http://cafe.daum.net/psj3851)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송호서원 묘우(廟宇) 상량문

문소(聞韶) 김광 지음

소급하여 천재를 논해 봄에 공 송의 문헌을 가히 징험하겠고 새롭게 한곳에 우뚝솟음 우러러봄에 훌륭한 집을 이루었드라.  폐하고 흠함 수 있음을 느끼겠고 제업이 무궁함 아름다워라
공손히 생각하니 충숙공 문선생은 이 고려조 명신이라 뿌리 깊은 교목에 무성공 경정공의 전함이어 받았고 힘차게 꽃다움 일어나서 때는 장효왕 명종의 때를 당했드라
남삼(음덕으로 벼슬한 사람의 복장)으로 시험장에 나감에 다섯차례 빈번히 과거봄을 혐의하지 않았고 바른말을 함에 삼권의 자행을 첫째로 탄핵하였드라. 폭발하는 비난을 당하여 나래를 내리고 잠시 머뭇거리드라 오직 있는 곳에 마음 다함에 황주의 치적 흡족히 나타나고 공의가 거짓되기 어려움 믿음에족히 육전의 제수입었드라
문무신이 서로 다툼을 당함에 임금이 바뀌는 것을 차마 보랴 자신의 애정 알지 못함 탄식하며 칼로 끊어버림 감수하드라 새임금이 즉위함을 당하여 또한 뭇 시기함을 만났더라 죄인풀어 등용함에 당시 두 직위를 겸하여 더하였고 일을 따라 주선함에 중행을 홀로 회복했드라.
사람 알아보는데 밝아 모두가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일컬으로 문장이 나라를 빛남에 다시 목천에 필적이 실려 있더라 승선과 추밀 및 명장 대위을 역임하고 예부와 춘방 및 아상 상서를 옮기며 승진하였네 은거하다 돌아가시어 왕조의 은전 영화롭게 갖춰지고 좋은 모훈 위대한 공열은 역사에 어진 재상이란 평 전하네
명종묘정에 배향되어 높은 공 기록됨에 재앙과 볼골 휴척을 함께 하고 사당을 창건하여 중론을 모음에 유부 읍하고 항부 겸하여 듣는자 흥기하지 않는 이 없더라 일찍이 후손 모여 삶 인연되어 유통의 간격 없음이 샘을 파 물을 얻음에 비유되고 이에 모셨던 송호서원이 금일의 편엄(偏嚴)에 금지되니 슬프도다.저 옛터에 물만 무성하더라.
정성스러운 자손들 손짓하니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 감히 잊을까.슬퍼하는 선비들 방황함은 회문할곳 없음이라. 엊그제 종족을 수합하는 자리에서 중건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분 한집안에 나지 않음에 누군들이 분주히 강기(綱記)하고 튼 집이 금시에 높이 세워짐에 거연히 빛남 새가 나는 듯 하드라 강당은 게사로 남은 것이 있음에 조금 수리함 더하였고 사당은 옛터 곁에 세워 다시 단청을 하드라 이에 종족이 호응하고 소림이 화례하드라
번창한 후손 널리펴져 그 헤아림 천만을 알지 못하고 솔선적으로 주창하여 다투어 그 의식을 십분 다하드라 좋은 시절 좋은날 모춘의 화창합 다하고 목택의 노래 부르며 종일 즐거움 다하드라 운물에 아름다운 빛나고 산천이 더욱 빛나드라 비록 노래 부르는 곡조 없으나 원근의 도움 해롭지 않으리라.
어량차 동을 보니 삼봉 밖으로 크게 통했구나 류전(流傳)이 홀로 문충의 귀절에 힘입었으니 어떤 사람 표박(漂泊)하여 동에 먼저 왔던고
어량차 서를 보니 한줄기 황매산 저문운애 아득하구나 아득히 남명선생 지나간 발자취 생각하니 험난한 돌길에 석양이 저무드라.
어량차 남을 보니 강성을 멀리 가르치니 영도(嶺道)가 길구나. 부민후의 공덕 또음 유음기로 남은 경사 떼지어 영호남에 입혔드라.
어량차 북을 보니 우리 도가 전래하여 셋 득을 지엇드라. 도덕이 사람에 가히 떠날 수 없으니 별들이 북두를 공읍하고 있음 같도다
어량처 상을보니 음운(陰雲)이 가리지 않아 밝은빛 내구나. 이 마음 본래 하늘과 더불어 통하였으니 지척을 어기지 않으면 위에 다달름 있으리
어량처 하를 보니 나간밖 긴강물 주야로 솟드라 구비구비 연변에 명승지 많으니 호연한 함벽(涵碧)이 모두 그 아래이드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후에 신의 기거가 기리 편안하고 풍운이 더욱 넓어지며 제사드림 이제부터 계속 쇠함없고 글읽고 사음례(射飮禮) 옛을 상고하여 가히 행하며 사람됨이 윤강을 멀리 할 수 없음에 왕자가 반드시 와서 치하하여 법(法)삼음 있고 좋은 땅에 자연이 명수가 있음에 후인들 마땅히 이 말씀 깊이 본받을것이다. 

송호서원 중건기

화산(花山) 권용현 지음

삼가의 역평에 옛부터 있었던 송호서원은 고려의 명신 문충숙공을 제사 드리는 곳이니 나라에서 금하여 훼철된지 이미 수십년이 되었다. 지금에 여러 후손들이 꾀하여 말하기를 이 서원은 복원치 않을 수 없다하고 옛터에 중건하고 다시 의식을 거행하고자 후손 모두가 공의 실기 한편을 가지고 와서 나한데 기문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이 고려국운이 쇠퇴한 중기에 낳아셔서 세세 높은 가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올랐으나 마침 황음한 혼주를 만나 권신이 세도를 부림에도 홀로 위풍을 지키며 감히 속임없이 말하니 당시에 조양에서 봉이 운다고 일컬었고 도리어 쫓겨남을 당하니 국인들이 다투어 통모(通慕)하여 화가가 그림속에 넣고 산의 스님이 시로 읊을 지경이었으니 그 곧고 굳센 기절(氣節)은 진실로 당시에 진동하였다. 좌천되어 외주를 지킴에 치적이 크게 나타나서 공의로 도로 불러들인즉 다시 정중부의 난을 만나 조정에 대변이 있었으나 어진 명망이 본대 현저함으로 그 역시 감히 그 흉악함을 펴지 못하였고 공역시 그 간에 있으며 많이 바르게 인도하여 선류가 되게하여서 이윽고 다시 중임에 발탁되어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휴멸이 관여되지 않은 바 없었다.
하평하고 근실하여 비록 큰 지모가와 위대한 업적이 없으나 인국과 사이가 좋아 안과 밖이 편암함이 실로 그 공에 힘입었으니 자못 공자가 이른 바 일컬은 무자의 우를 가히 미치지 못하다 함이니 어찌 아름답고 위대하지 않으리오. 마땅히 그 후인들이 기리 생각하며 백세토록 사당에 제사드릴진져 성왕의 제사드리는 법이 홀로 도덕적인 스승에만 위주한 것이 아니라 무릇 공훈이 있는 자 참여되지 않는이 없는 고로 주관(周官)에 사훈(司勳)씨를 두어 제증(祭烝)의 예를 서명하였으니 기에 왈 죽엄으로 일에 근실한즉 제사드리고 훈로로 나라에 안정시킨즉 제사드리고 능히 큰 재앙을 막거나 큰 환난을 막은즉 제사드린다 하였으니 당일 공의 벼슬한 시종이 가위 큰 환난을 막고 훈로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할 수 있은즉 그 사동에 공을 기록함이 기전의 열에 의당 들 수 있으니 어찌 가히 후세라 하여 보답함을 소홀히 하겠는가?
예전에 공을 모신곳이 세곳이 있었으니 전주 저산서원과 남평 장연서원과 송호서원이 그중 하나이다.
공의 발자취가 호남에 있은즉 호남에서 제사드림이 마땅하고 영우(嶺右)에 있는 송호서원은 공의 자취와 관여됨 없는 듯 하나 공의 6세손 판서 근(瑾)으로부터 처음 남쪽 합천에 와서 살아 수십세가 지난 지금에 자손이 번창하여 근읍에 흩어져 살아 울연이 큰 문벌이 되었으니 공의 정령이 마땅히 자손들이 사는데 도우심 있음이니 사당지어 봉양함을 어찌 가히 그만두리오.
항차 공의 공적과 노력이 온나라에 있은즉 풍운의 혜택이 진실로 멀고 가깝고 저곳 이곳이 다름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지금에 상해(桑海;상전벽해)가 누차 번복되고 어지러움이 날로 심하여 인기다 다 떨어져 국가를 가히 국가라 할 수 없은즉 공이 직도의 행치와 봉공의 충성은 또한 족히 후세에 법측으로 전하여 세상을 깨우칠 것이다. 그렇다하면 이 사당을 중건함이 장차 반드시 세인을 흥기시켜 본받음 있을 것이니 세상을 교화시키는데 도움이 적지 않을 것이니 어찌 곧 옛을 추념하여 없어진 의식을 거행함 뿐이리오. 이 또한 제위 문씨의 뜻을 나로 하여금 기록하게 한 바이다.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180쪽

 

송호서원 사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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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소개영상

주련과 현판

2019년 향사

2017년 향사-1

2017년 향사-2

2016년 향사-1

2016년 향사-2

2009년 향사

2006년 향사

2005년 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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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서원 입구문과 계단

송호서원 출입문 측면

내삼문 신실입구문

 

 

외삼문

신실문

서원 강당

충숙공 문선생 사적비

신실

관리사

 

주련과 현판

강당의 현판

 

 

 

 

 

  충숙공위피 효혜공위패

임금의 시에 대한 화답의 시

간언이 무시되니 사직후 하향하면서 지은시

년광임염암상침

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두어나

보국사량일점심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깊어 지나이다

자원군은유미보

임금님

은혜 갚자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무정백발기잉잠

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주운절함비천예

주운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함 아니고

원앙당차개위신

원앙이

수레 가로막은 일

일신 위함일까

일편단성천미조

일편단심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강편영마퇴준순

여윈 말 세게 채찍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린다

이인로가 지은 만시(기둥이 4개여서 일부만 주련으로 달았슴)

못은 中書省을 말하고 흰닭은 신유년을 말하는 것임

   

영특한 그 모습이 上臺星을 응했었고

   

옥병의 얼음같이 그 마음 깨끗했네

 

일찍이 대궐문의 구름을 헤치어 외치었고

 

늘그막에 우연에서 해를 돌이켰네

단봉구욕지상

단봉은 오래도록 못 위에서 목욕하였는데

백계

흰닭은 어찌하여 꿈 속에서 재촉했나

.

 

사조(謝跳)의 '푸른 이끼' 시구만이 남아서


 

온 세상 만인(萬人)의 입에 우뢰같이 전하네

대문의 주련

 

궁궐의

대문을

두드려

 

봉서의

말이

당시의

국난에

적절했더라

 

 

2009년 행사사진

행사전의 유림과 인사

유림의 참석자

성금접수

유림의 인사

문재룡 송호서원관리위원장

축문 쓰기

딸과 며느리의 참석

   

분정기

축문

행사중인 유림과 참제자

집례

찬창

집사

 

2006년 행사사진

   

       

     
분정기

관리사에서 제사 준비

성금 접수

행사전 유림의 모임

유림의 행사 준비

   

행사진행중인 헌관과 집사

행사후 유림의 식사

 

 

 

2005년 행사사진

행사전의 일가님들

진설

분정기

축문

 

 

 

 

 

상안위원장

2005년 총회

기념촬영  문병영 문경동 문재구 문칠순 문종근

 

 

총회

서제에서 중식

고사체의 음식마련

향사전일 저녁 자환님의 접대

 

주변 관광지

합천의병기념관

합천영화테마파크

김종직 도연재

판서공파 납골묘


합천의병기념관

임란 창의 기념탑


합천임란 창의 기념탑 안내문

협천임란 창의사적비

합천 의병 봉기 지역

 

 

 

 

 

합천 영화테마파크

   
   
 

     

판서공파 수도제종중 납골묘 영위당(경남 합천)

비석 앞면

 


김종직선생을 모신 도연재와 종가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112번지-

도연재와 현판

도연제 안내판

마을입구의 비석

주차장과 고가

종택안내석

종택입구

종택내부

김종직선생 신실

김종직선생과 문씨부인의 설명